친구의 고민을 두 시간 들었어요. 말 사이의 침묵까지 받아 주고, 던지듯 한 말의 밑바닥까지 헤아려 줬죠.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아차려요. 오늘도 내 이야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는 걸. 사실 꺼낼 틈이 없었다기보다, 꺼내지 않는 쪽을 골랐는지도 몰라요. 내 마음은 설명이 길어서, 반쯤 이해받을 바에는 그냥 삼키는 게 나았으니까. 사람들은 지혜형에게 와서 마음을 쏟아 놓고 가벼워져서 돌아가요. 그날 그 자리에 고인 것들은 조용히 당신 몫으로 남고요.
목이 마른 사람은 물가를 찾아요. 지혜형 곁에 사람이 모이는 건 그래서예요. 어떤 말도 튕겨 내지 않고 받아 주는 깊이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아보거든요. 다치는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. 당신은 상대의 바닥까지 내려가 주는데, 당신의 바닥까지 내려와 주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. 그건 당신이 정을 잘못 준 탓도, 사람을 잘못 고른 탓도 아니에요. 깊은 물일수록 같은 깊이의 손님이 드문 것뿐이에요. 그 외로움은 흠이 아니라 깊이의 그림자 같은 거고요.
삼키는 게 버릇이 되면, 아무도 당신에게 물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해요. 상대가 무심해서가 아니라, 수면이 너무 잔잔해서 그 아래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. 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. 잘 정리된 이야기가 아니어도 되고요. 나 요즘 좀 가라앉아 있어, 정도의 한 줄이면 충분해요. 오늘 하나만, 듣는 자리에서 잠깐 내려와 말하는 자리에 앉아 봐도 돼요. 물을 청하는 쪽이 되어 보는 것도, 물가에 사는 사람의 권리니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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